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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문] 가족규정 삭제없이 호주제 폐지 없다

 
  

 
[기사문] 가족규정 삭제없이 호주제 폐지 없다
발행일 : 2003-10-30 등록일 : 2003-10-30
[일다 ]
  
민법개정안, 여성계 염원 맞나

지난 28일 호주제 폐지와 더불어 당초 민법에서 사라지기로 돼있던 ‘가족의 범주’를 다시 규정한 새 민법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24일 정부가 갑작스럽게 ‘가족의 범주’를 재규정하겠다고 밝힌 지 불과 4일만에 일어난 일이다.

국무회의가 끝나고 지은희 여성부 장관은 “(새로운 가족의 범주 규정이) 이 정도면 문제없을 것”이라며, “합리적인 가족을 재구성할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될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또한 “여성계의 40년 숙원이 풀리게 돼 무척 기쁘다"고 말했다. 같은 날 한국여성단체연합은 "개정안에 대한 국무회의 통과를 대단히 환영하는 바”라며, “이번 민법개정안이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가족관계 형성에 견인차 역할을 할 것이라고 본다”는 논평을 냈다.

여성계의 염원이었던 호주제 폐지를 위해 노력해 온 여성부와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이런 입장을 보인 것은 여러 모로 의아한 일이다. 왜냐하면 호주제가 위헌임을 주장해 온 법학자들은 현행 민법에 규정된 ‘가족’ 규정을 삭제하지 않고선 실질적으로 호주제 폐지 의의를 살릴 수 없다고 밝혀왔기 때문이다.

민법개정안의 내용과 한계

새 민법개정안을 살펴보면, 일단 '호주' 개념이 없어지고 따라서 '호주 승계'도 없어진다. 자녀의 성과 본을 변경하는 문제에 있어서, 이혼하거나 재혼한 여성의 자녀의 경우는 ‘복리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될 때’에 한해 ‘가정법원의 허가를 받았을 때’ 바꿀 수 있다.

여성부 장관과 여성계가 ‘성과’로 강조한 ‘부계성 강제조항’의 폐지는 그러나 ‘어머니 성을 쓸 수 있는 자유’라고 해석하기엔 무리가 따른다. 아버지 성을 따르는 것이 원칙이고, 어머니 성을 따를 수 있는 가능성을 두긴 했지만 ‘혼인 신고 시’에 ‘부부협의가 되었을 때’에 한한 것이다. 즉 ‘자녀’가 어머니 성을 쓰고자 한다고 해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결혼제도 바깥에 있거나 특수한 상황에 처한 ‘어머니’가 필요에 의해 결정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급조된 가족범위, 현실 반영 못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가족의 범위’ 규정이다. 개정안에선 가족의 범위를 ▶부부 ▶그와 생계를 같이하는 직계혈족 및 그 배우자 ▶부부와 생계를 같이하는 그 형제, 자매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규정은 그 자체로 ‘애매하고 말이 안 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가령, 부모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며느리나 사위가 가족에 포함되지만, 자식의 입장이라면 배우자 없이 장모나 장인, 혹은 시부모와 함께 사는 경우엔 가족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생긴다.

이 규정은 ‘부부’를 중심으로 하고 ‘혈통’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친족 개념보다는 좁지만 핵가족 개념보다는 넓다. 혈연이나 ‘결혼제도’를 넘어선 관계는 전혀 포괄하지 않고 있으며, 친족이라 하더라도 특정한 관계만을 가족으로 인정하고 있다. 여성계가 그 동안 주장해 온 ‘현실 가족’, ‘다양한 가족’, ‘합리적 가족’ 개념은 흔적도 찾아보기 어렵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지은희 장관은 ‘생계를 함께하는’이란 조항에 대해 “경제적인 관념을 포함한 생활공동체의 의미가 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공동체’라는 표현은 가당치 않은 것이다. 이 조항에 따르면 아무리 경제적인 생활공동체를 꾸린다 한들 ‘혈연’ 지간이 아니면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까지 여성계에서 말해 온 ‘공동체 가족’이란 혈족개념을 뛰어넘는 가족을 의미하는 것이다.

가족규정 필요하다는 것은 ‘구실’

호주제를 폐지했을 때 민법 상 ‘가족’ 규정을 어떻게 두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는 이미 지난 달 법무부가 입법 예고한 새로운 민법개정안과 호적법개정안을 만드는 과정에서 진행됐다. 법무부 가족법개정특별위원회 측은 ‘가족의 범위’ 규정을 두고 여러 차례 논의를 거쳐 결국 ‘가족’ 조항을 삭제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민법과 호적법은 국민들의 ‘현실을 반영해야’ 하는데, 가족을 어떤 식으로 규정한다 하더라도 현실의 다양한 가족형태와 딱 맞아떨어질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만약 임의로 가족을 규정했을 때, 이 규정에 포함되지 않는 실질적인 생활공동체들은 호주제 폐지 이후로도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차별을 겪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민법개정안은 국무회의를 거치는 과정에서 4일만에 가족의 범위를 다시 규정했다. 고건 국무총리를 비롯해 몇몇 장관들이 밝힌 이유는 첫째 가족 해체를 우려하는 국민정서를 고려해서이고, 둘째 다른 여러 가지 법령에 가족개념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민법이 그 개념을 정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양현아 서울대 법대 교수는 “민법상 가족이 규정되어있지 않다고 해서 실질적인 가족(family)이 해체되는 것이 아닌데, 국민들의 감정상의 문제를 거론하면서 가족 규정을 무리하게 둔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또한 이같은 규정이 “기존 ‘가족의 정상성’ 개념 등으로 인해 생긴 문제점들을 그대로 방치한다는 점에서 호주제 폐지 의의와 배치된다”고 비판했다.

양현아 교수는 또 “민법이 정한 가족개념이 아니라 개별 법률에서 새롭게 가족 개념을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복지수급, 보험료 산정 등 경제적 실익과 관련이 있는 법조문들은 “현실적인 형평성을 고려해 대상자를 새롭게 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승우 성균관대 법학 교수 역시 29일자 문화일보에 기고한 ‘가족개념 논란거리 못된다’ 제하의 칼럼을 통해 “개별법에서 쓰는 가족개념은 그 개별법의 입법 목적, 취지에 따라 그 내용과 의미가 각기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가족개념을 민법에 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호주제 폐지, 대안이 중요하다

양현아 서울대 법대 교수는 이번 민법개정안에 대해 “호주제 폐지는 전 국민의 문제인데 과연 (국무회의에서) 얼마나 자문을 얻어, 몇 시간 동안 생각해서 만든 것인지 모르겠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새로 규정한 ‘가족의 범주’ 조항이 호주제 폐지 의의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지난 달 법무부가 대안으로 채택한 ‘개인별신분등록제’의 내용과도 잘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민법개정안은 이렇듯 많은 문제점을 안은 채 국무회의를 통과했지만, 여성부 장관은 “문제없을 것”이라고 발언했다. 또 새롭게 정한 가족의 범위가 합리적인 가족개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합리적인 가족을 재구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한편 한국여성단체연합은 이번 민법개정안이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가족관계 형성에 견인차 역할을 할 것”이라고 논평했다. 그러나 ‘호주’와 관련된 부분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어디에도 ‘민주적’인 모습을 찾기는 어렵다. 동거 등 비혈연 생활공동체, 그리고 새로운 민법규정에 해당하지 않는 현실 속의 다양한 가족들을 배제하고 있기 때문에 ‘수평적’이라고 볼 수도 없다.

호주제 폐지는 곧 ‘호주제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호주제 폐지가 40년간 여성계의 염원이었던 것을 생각해보았을 때, 지난 4일간의 ‘가족의 범주’를 규정하는 과정은 참으로 무리한 해프닝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여성부와 한국여성단체연합의 반응 역시 ‘성과주의’에 급급하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호주제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선 새 민법개정안의 급조된 ‘가족’ 규정은 삭제돼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정부와 언론은 민법에 가족 규정이 없다고 가족이 해체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국민들에게 알릴 의무가 있다. 또한 여성계와 정부가 함께 나서서 호주제 폐지의 대안으로 개개인이 ‘평등’한 신분등록제 도입을 촉구하고, 각 법령을 현실에 맞게 정비하는 작업에 착수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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