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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문] <바람난 가족> 주연배우 문소리

 
  

 
[기사문] <바람난 가족> 주연배우 문소리
발행일 : 2003-07-31 등록일 : 2003-08-11
[한겨레]
"알몸연기? 호주제 폐지 서명?
다 양심대로 사는거죠, 뭐"


이 여자, 배우같지 않다. 소매없는 허름한 티셔츠에 츄리닝바지입고, 동네 마실 나온 듯 나타났다. 이러고 사진 찍으려나 물론 그건 아니었다. 준비해온 의상으로 갈아입고는 거울 보면서 꼼꼼히 살핀다. 잠시 배우 같다. 사진 촬영 뒤 다시 마실 차림으로 갈아입고는 배가 고프단다. 식당가서 밥 먹으며 인터뷰 하잔다. “먹이고 말 시킬 때와, 안 먹이고 말 시킬 때가 다를 걸요.” 이 가공할 협박 앞에서, 식당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문소리(29)는 직접 보면 배우같지 않다. 친구의 누나 내지 여동생, 또는 학교 선후배 등의 연으로 전부터 보아온 것만 같다. 그런데 영화에서 맡은 역할은 파격의 연속이다. <박하사탕>에서 영호의 첫사랑 순임은 예행연습이었다고 치자. <오아시스>의 뇌성마비자나, (입 걸기로 유명한 임상수 감독 스스로 ‘떡 영화’라고 부르는) <바람난 가족>에서 마구 벗어버리는 바람난 유부녀나 모두 다른 여배우들 같으면 안 맡으려고 하는 역할이다. 또 두 캐릭터가 상극이다. 전자는 정절을 중시하는 순정파이고, 후자는 반대다. 캐릭터뿐 아니라 영화가 다르다. 좀 거창한 표현을 빌어, 정의와 자유는 본질적으로 상충한다고 누군가 말했다. 정의는 공동체적 가치이고, 자유는 개인적 가치이다. 이창동 감독 영화가 정의를 추구한다면, 임상수 감독 영화는 자유를 추구한다. <오아시스>는 병든 공동체를 비판하는 반면, <바람난 가족>은 가족이라는 공동체 자체를 조롱한다. 다른 두 세계를 연이어 산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문소리는 절망과 약속의 땅 <오아시스>에서 베니스영화제 신인배우상을 거머쥐더니, 농담과 냉소의 나라 <바람난 가족>으로 건너가선 옆집 고교생을 유혹하고 남편과 앙칼지게 싸우는 일을 잘도 해낸다. 행동거지만 소탈한 게 아니다. 두 가치의 충돌을 버텨낼 만큼 지적인 그릇이 커 보인다. 얼굴과 이미지 관리에 몰두하는 여배우들이 많은 충무로에서, 그가 소중하게 여겨지는 이유다.


■ 임상수 감독

대학생 때 <처녀들의 저녁 식사>를 봤다. ‘야하다’고 놀랬고 공감은 잘 안 갔다. <눈물>은 거칠고 패기가 있었다. 조금은 진심도 느껴졌다. 애들 데리고 사기치는 영화는 아니구나. 그런데 왜 이 감독은 이렇게 섹스에 관심이 집요한 걸까 궁금했다. <바람난 가족> 시나리오 받고 고민하다가 만나보니까 생각이 확고하고 소신이 있더라. 작품이 힘이 있겠구나 싶었다. 촬영 시작 전에 엠티를 갔다. 임 감독은 ‘떡 영화’ 전문 감독이라고 자신을 소개했고, 김우형 촬영감독은 자기도 만만치 않다며 <해피엔드> <거짓말> 등 전작을 열거했다. 상대역인 황정민은 자기 여자친구의 말을 빌었다. “(<로드무비>에서)남자랑 하고, 이번에 여자랑 하니까, 다음엔 동물이네.” 모두 뒤집어졌다. 나는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랬다.


■ 여배우가 옷 벗으면 이후에 잘 안 팔린다?

내가 걱정스러운데, 남들이 함께 걱정해주면 다른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를 위해 하는 말일 텐데, 그 말이 대단한 논리나 명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렇다더라는 거였다. 에이, 별 거 아니구나. 어차피 <오아시스>할 때부터 다음 작품 생각 안 했는데 하나라도 더 했으면 다행이지. (배우 이름만으로 관객 몇십만명을 동원한다는 식의) 스타파워를 키운다 내 작은 마음과 짧은 머리로 아무리 생각한다고 해서 인생이 풀리는 것도 아니고. 반듯하게 가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양심을 속이지 않고.

■ 호주제 폐지 서명

어차피 배우가 아니라, 대학 때 처음 목표대로 교사가 됐더라도 했을 일이다. 배우로서 한 건 스크린쿼터 사수운동 뿐이고. 그런데 그런 행동 때문에 다른 이미지가 나오니까, 주변에서 관객들이 영화보는 데 방해된다고 한다. 그말도 틀리진 않은 것같고, 또 배우가 사회부 기자 만나기도 싫고. 호주제 폐지 기자회견할 때 뒷줄에 가서 앉으려고 했는데, 한줄밖에 없는 거였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도 카메라가 자꾸 찍고. 그래도 필요한 자기 입장은 표명하고 살려고 한다. 이미 충분히 위험한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더 이상 잃을 것도 없고.

임범 기자 isman@hani.co.kr,사진 김경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