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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문] 호주제 폐지 ‘서포터스’

 
  

 
[기사문] 호주제 폐지 ‘서포터스’
발행일 : 2003-08-06 등록일 : 2003-08-11
[시네21]

드라마 <노란 손수건> <그대 아직도…>의 특별한 홍보… 제도의 문제 극적으로 다뤄 폐지론 공감대 넓혀

최근 호주제의 폐해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드라마들이 방영되고 있다. 한국방송 일일드라마 <노란 손수건>과 문화방송 아침드라마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가 그것이다. 두 드라마는 모두 여자 주인공이 혼자 낳아 기른 아이를 옛 애인인 친부가 빼앗아가려고 하는 갈등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SBS 아침드라마 <당신 곁으로> 또한 상황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아이를 낳은 어머니의 권리를 무시한 채 친부가 일방적으로 아이에 대한 친권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두 드라마와 비슷한 갈등 양상을 보이고 있다.


호주제에 무릎 꿇는 ‘모계 가족들’


드라마 속 상황이 어떤 것인지 먼저 <노란 손수건>을 보자. 윤자영(이태란)과 이상민(김호진)은 오랜 연인 사이였으나 이상민은 성공을 위해 회사 사장인 조민주(추상미)와 결혼한다. 결혼 전 윤자영의 임신 사실을 안 이상민은 임신중절 수술을 하라며 병원에까지 데려다주지만 윤자영은 이상민 몰래 아들을 낳아 기른다. 아내가 아이를 낳지 못해 딸을 입양한 이상민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대를 이을 손자’를 원하는 아버지 뜻에 따라 아이를 자신의 호적에 입적하겠다고 나선다. 어머니의 성(姓)을 따라 ‘윤지민’이었던 아이를 ‘이지민’으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윤자영은 자신과 결혼하기로 한 정영준(조민기)의 호적에 아이를 입적해 ‘정지민’이 되게 하려 하지만 법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의 차문경(배종옥)은 윤자영보다 더욱 비극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 이혼 뒤 만난 대학동창 김혁주(조민기)와의 사이에 아들 문혁을 낳지만 김혁주는 이미 다른 여자와 결혼한 상태다. 몇년 뒤 나타난 김혁주는 친부의 권리를 주장하며 아이를 자신의 호적에 입적시키고 양육권 소송까지 건다. 차문경은 결국 양육권 소송에서 패소해 아이까지 뺏기고 만다.

드라마를 본 많은 시청자들이 “어머니는 아이에 대해 아무런 권리도 가질 수 없는 것이냐”며 분노하지만 이는 현행 법률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노란 손수건>에서 상세하게 그려진 것처럼 실제 아버지가 자신이 아이의 친부라고 간단한 ‘인지 신고’만 하면 강제적으로 아이는 아버지의 호적에 입적되고 성도 아버지를 따르게 된다. ‘부계중심’의 호주제가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는 현행 법에서 어머니, 즉 여성은 어떠한 사회적·법률적 권리도 가질 수 없다. 여성이 경제력을 가지게 되고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면서 임신·출산·육아 등에 대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사회 의식이 바뀌고 있지만 법은 현실을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 <노란 손수건>의 윤자영과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의 차문경이 ‘독신모’로서 당당하게 ‘모계 가족’을 꾸려왔다고 할지라도 호주제 앞에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여성계를 중심으로 오랫동안 진행돼온 호주제 폐지운동은 이같은 불합리한 현실을 근거로 한다. 호주제는 부, 모, 자녀로 구성되지 않은 가족, 즉 독신모 가족, 이혼 가족 등을 ‘비정상’으로 규정하며 많은 폐해를 낳고 있다. 예를 들어, 부부가 이혼하는 경우 부인은 남편의 호적에서 분리되지만 아이는 그대로 남게 된다. 때문에 아이가 어머니와 함께 살더라도 주민등록상에는 ‘자녀’가 아닌 ‘동거인’으로 기록된다. 어머니가 재혼이라도 하면 함께 사는 부, 모, 자녀가 모두 성이 다른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상담위원인 진선미 변호사는 “친권과 양육권은 재판을 통해 어머니가 권리를 인정받을 수 있지만 호적 문제는 현재로서는 방법이 없다. 호주제 때문에 피해를 입는 사례를 보면 굳이 드러나지 않아도 되는 사생활이 드러나 이중 삼중의 고통을 겪는 경우가 많다. 호주제가 빨리 폐지되어야 상처받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차별성이 완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가족’은 ‘비정상’으로 취급되는 현실

△사진/ 아이를 낳아 기른 여성이 아이에 대해 아무런 권리를 가질 수 없는 현실을 다룬 드라마들이 호주제의 폐해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있다.  
올해 들어 호주제 폐지를 위한 움직임은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민주당 이미경 의원 등 국회의원 52명은 호주제 폐지를 내용으로 하는 민법개정안을 공동발의했고 여성부는 지난 5월 7개 부처와 11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하는 ‘호주제폐지특별기획단’을 구성했다. 법무부, 행정자치부, 참여연대, 한국가정법률상담소, 한국여성단체연합,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의 모임 등이 참여한 이 기획단은 9월 초 정기국회에서 호주제 폐지 내용을 담은 민법개정안을 통과시키는 것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다. 여성부 차별개선국 최성지 서기관은 “국민 대다수가 호주제 폐지 혹은 개선을 원하고 있는 만큼 올해 말까지 호주제 폐지 문제가 매듭지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한국가정법률상담소가 지난 4, 5월에 걸쳐 실시한 ‘호주제 국민의식 조사’에서 호주제 폐지에 찬성하는 의견이 66.2%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여성의 경우 82.3%의 높은 찬성률을 보였는데, 이는 호주제로 인해 실질적인 불평등을 겪는 것이 주로 여성이기 때문이다. 가족 붕괴 등을 이유로 호주제 폐지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지만 오히려 여성을 남성에게 종속시키는 가부장적인 호주제가 폐지된다면 평등하고 건강한 가족관계가 형성되고 나아가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남녀차별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그렇다면 호주제가 폐지될 경우 신분증명 제도로서의 호적은 어떻게 바뀔까 현재 가족부제(기본가족별 편제방식)와 1인1적제(개인별 편제방식)가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가족부제는 부부와 미혼자녀로 구성된 2대의 가족관계를 기록하는 방식이다. 부부가 이혼하는 경우에는 각각 새로운 가족부를 만들게 되는데 기존에 자녀가 무조건 아버지 호적에 남도록 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어머니가 친권자가 되면 자신의 가족부에 자녀를 기록하게 된다. 1인1적제는 개인별로 신분등록표를 갖게 되는 방식으로 각 개인의 신분변동 사항을 기재하고 부모, 배우자, 자녀는 간단한 신원만 기재하여 친족관계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진선미 변호사는 “가족부제를 채택할 경우 자녀를 누구의 호적에 올리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기 때문에 독신가족, 이혼가족 등을 여전히 비정상적 가족으로 보게 된다. 호적을 옮기는 문제가 없어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포용할 수 있는 1인1적제가 가장 이상적인 대안이다”라고 말했다.


드라마 게시판에 폐지 지지글 많아

이렇듯 호주제 폐지 논의가 본격화되는 상황에서 호주제의 폐해를 직접적으로 그려낸 드라마의 방영은 사회적인 의식전환 효과가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실제로 <노란 손수건> 등의 드라마 게시판에는 호주제 폐지를 둘러싼 논쟁이 활발하게 오가고 있고 “호주제 때문에 아이를 지우라고 했던 아버지가 나타나 뻔뻔하게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니 말도 안 된다. 드라마 때문에 호주제에 관심이 많아졌다”는 내용의 글들이 적잖이 올라오고 있다. 한국여성단체연합 호주제폐지운동본부의 최정아 사회복지부장은 “드라마는 접근성이 높은데다 쉽게 문제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호주제 폐지의 필요성을 홍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이런 드라마들을 통해 호주제 폐지에 대한 폭넓은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피소현 기자 | 한겨레 스카이라이프부 plave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