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문] “호주제 폐지는 이제 상식이죠” | ||
발행일 : 2003-09-09 | 등록일 : 2003-09-09 | |
[주간동아] 법무부가 8월 말 국민 개개인의 신분을 등록하는 ‘개인별 신분등록제’를 도입하는 민법 개정안을 발표했다. 약 50년 만에 호주를 중심으로 한 가족단위등록제인 호주제가 사라질 운명에 놓인 것이다. 그동안 호주제 폐지를 위해 싸워온 여성·시민단체에서는 정부안이 완전한 ‘개인별 신분등록제’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우려하면서도, 진일보한 개정안이라며 이번 정기국회에서 통과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총선을 앞두고 일부 국회의원들이 명확한 입장 표명을 미루고 있으나,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성인 남성의 절반 이상, 그리고 네티즌의 70% 이상이 호주제 폐지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호주폐 폐지가 자연스러운 ‘흐름’이 된 것이다. 주간동아는 호주제 폐지를 위해 전선의 전방과 후방, 양지와 음지에서 싸워온 단체와 개인들을 만나 그동안 기울여온 노력과 앞으로의 희망에 대해 들었다. 고은광순씨와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의 모임 “호주제 폐지의 일등공신은 인터넷이에요. 물론 ‘사이버 마초’들을 양산하긴 했지만 인터넷을 통해 토론도 하고 힘을 모을 수 있었으니까요.” 이제 호주제 폐지 운동의 상징이 된 고은광순 홍명한의원 원장. ‘원장님’이 환자 돌보며 ‘부모 성 함께 쓰기 운동’(1997년)을 시작하고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의 모임’(98년)을 결성해 운동가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병원과 밖을 연결하는 인터넷(통신) 덕분이란다. “호주제 폐지는 유림이 아니라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무지’와 ‘무식’을 상대로 싸우는 일이었어요. 사법부 연구원들이 제게 여자들도 ‘씨가 있느냐’고 물을 땐 기가 막혔지만, 그래도 논리적으로 허위의식을 깨야만 우리가 조금씩이라도 진정한 민주주의에 다가간다고 믿었어요.”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다니다 학원시위 배후 주동자로 찍혀 제적당하고 한의학을 선택한 순간부터 고은광순 원장의 갈 길은 정해져 있었을 것이다. 불의가 판치는 세상, 쓸모없는 학문을 거부한 이상 스스로 ‘유용한’ 인간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병원을 운영하면서 여아 낙태문제가 너무나 심각하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 고원장은 우선 호주제를 폐지해야 사람들의 의식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7년 전의 일이다. 그때만 해도 고원장은 급진적인 ‘여성운동가’로 비쳐졌다. 고원장은 “그때 부모 성을 같이 쓴 사람들이나 요즘 전혀 새로운 이름을 쓰는 후배들을 보면 참 고맙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법무부 안에 85점을 주면서도 “올해 3, 4월만 해도 정부 반응이 ‘시기상조’란 쪽이어서 절망적이었는데 그때에 비하면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상주의자지만, 스스로 땅에 발 딛고 살고 있음을 아는 사람다운 평가다. 남윤인순씨와 여성단체연합 남윤인순 여성단체연합(대표 이오경숙) 사무총장한테서 늘 ‘똑똑한 옆집 언니’라는 인상을 받는 것은 여성과 관련된 민감한 사안이 이슈가 될 때마다 TV와 지면을 통해 자주 만나는 여성운동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론조사를 해봐도 사람들이 호주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것을 ‘상식’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상속·재산 문제를 다루는 법이 있는데도 오로지 호주를 정점으로 가족을 서열화하기 위해 ‘호주와 가족’이라는 별도의 장을 민법 안에 두는 것이 불필요하다는 것이지요. 농경사회라면 모르지만, 현대사회와 맞지도 않고요. 그런데 언론에서 여전히 ‘호주제 논란’이라 쓴 걸 보면, 그렇게 속상할 수가 없어요.” 남 사무총장은 그 같은 ‘균형’ 잡히지 않은 잘못된 표현이 유권자들의 눈치를 보는 국회의원들을 흔들리게 할까 걱정이다. 94년 여성단체연합에서 일하기 시작한 이후 호주제 폐지는 늘 그의 화두였다. 불평등한 제도들을 바꾸기 위해 여러 가지 운동을 벌여왔지만, 제도가 바뀌어도 현실에 반영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남 사무총장은 이것이 고정된 의식 때문임을 깨달았고, 이 의식을 완강하게 붙잡고 있는 것이 호주제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다른 나라에도 아버지 성을 따르는 경우는 있지만 이것은 ‘관습’에 의한 것일 뿐 ‘법’으로 강제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라는 사실, 새아빠가 아이를 키워도 여권을 발급 받을 때조차 생부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현실 등이 호주제 폐지에 대한 남 사무총장의 각오를 다지게 했다. “어떤 법 때문에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있는데, 그 법이 없어져도 피해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그 법을 없애는 게 마땅하지요. 호주제가 가정을 파괴한다고 걱정하는 분들이 있는데, 호주제가 폐지되면 오히려 가족관계가 평등해질 거고요.” 요즘 매일 저녁 각종 매체와 인터뷰하랴 밀린 일 하랴 퇴근시간이 따로 없다는 남 사무총장의 남편은 환경운동연합의 서주원 사무총장이다. 남 사무총장은 “‘부부 사무총장’이어서 서로 일 많이 하긴 좋다”며 웃는다. 호주제 폐지를 위한 천주교연대 공동대표 하유설 신부 8월26일 호주제 폐지의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해 한나라당을 방문한 여성운동가들 사이에 푸른 눈의 외국인 신부가 끼어 있어 눈길을 모았다. 바로 하유설 ‘호주제 폐지를 위한 천주교연대’ 공동대표다. 그가 시위대 사이에서 ‘호주제 폐지’를 외치는 모습을 상상하긴 쉽지 않다. 그러나 하신부는 69년 우리나라로 건너와 미국 ‘유학’ 기간인 5년을 빼고는 꼬박 이 땅에서 살아온 ‘한국’ 사람이다. “처음 호주제를 알게 됐을 때 ‘남자가 으뜸’이라고 법으로 정해놓았다는 것이 충격적이었어요. 미국도 틀림없는 가부장제사회지만, 법적으로 남성이 우월하다는 걸 보장하진 않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남성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95년 이후 본격적으로 호주제 폐지 등 여성계의 주장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한다. 그는 호주제가 대표하는 가부장제로 인해 많은 아버지와 아들들이 불편한 관계를 맺게 된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남성도 피해자라는 것. “남성 중심의 사상 때문에 여자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마음속에 큰 상처를 안고 자라게 됩니다. 신부로서 그런 여성들의 슬픔에 귀 기울였고 하나님께서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게 살기를 원한다고 믿기 때문에 호주제 폐지 운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종교인에게 이보다 더 큰 행동의 이유가 있을까. 그는 앞으로 더 많은 한국 여성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국회의원 이미경 올 5월 동료의원 52명과 함께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한 민법 개정안을 발의한 이미경 국회의원은 정부입법안이 마련됐다는 소식에 “개인적으로는 10년 동안 기울여온 노력의 결실이지만 지난 56년부터 시작된, 고 이태영 박사를 중심으로 여성계가 호주제 폐지를 위해 싸워온 긴 역사를 생각하면 감회가 새롭다”는 말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당시는 유림들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절이라 여건이 더 어려웠어요. 지금 우리야 무르익은 열매를 따는 것뿐이죠.” 이의원은 개인적으로 유교 전통이 강한 지방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제사 지낼 아들이 없으면 양자를 들이는 게 자연스러울 정도였으나 불행하게도(?) 이의원은 호주제의 폐해를 피부로 느끼진 못했다고 했다. “오히려 지금도 고고한 선비정신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지금도 고향 가면 어른들은 ‘고향서 뭐가 아쉬웠다고 호주제 폐지 같은 걸 주장하냐’고 나무라세요.” 이의원은 인권문제에 대한 관심에서 호주제의 문제점을 바라보게 되었으며, 여성과 남성이 똑같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 호주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확신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회의원으로서 유권자의 한 표가 아쉬울 때도 있었을 것이다. “손해 봐도 하는 사람이 있어야지요. 하지만 호주제 폐지의 경우 언제 국회에서 통과시킬 거냐는 압력을 더 많이 받아요.” 그는 일종의 ‘타협안’으로 법무부 안이 나온 이상 그 어느 때보다 본회의에서 통과될 전망이 밝다며, “이번엔 꼭 국민들의 희망 한 가지를 이룰 것”이라고 약속했다. 서울대 생명과학부 최재천 교수 최재천 교수는 많은 여성운동가들로부터 ‘사랑’받는 학자다. 우선 최교수는 여성단체의 호주제 폐지 세미나가 열리는 곳을 찾아다니며 방청석에서 응원을 보내는 열혈 ‘서포터’다. 최교수의 응원은 조용하지만 어디 가나 청일점이어서 눈에 띈다. 그러나 최교수가 호주제 폐지에 더 크게 기여한 바는 그의 학자적 관점을 통해서다. 8월 초에 나온 그의 책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는 호주제에 대한 사회생물학자로서의 그의 관점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여성운동 ‘서포터’답게 제1장의 소제목이 ‘호주제는 생물학적 모순’이다. “동물 세포핵의 DNA는 암컷과 수컷이 섞이기 때문에 혈통을 따지기 어렵죠. 반면 미토콘드리아 등 세포질 내 DNA는 암컷만이 제공하므로 생물학적 입장에선 혈통이란 암컷에서 암컷에게로만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물학자의 눈에 호주제가 자연에 반하는 제도로 보인다는 것이죠.” 최교수가 새로운 관점에서 이런 주장을 펼치자 일부 남성들로부터 ‘빙신’ ‘남자 망신 도매상’ ‘동성애자’란 비난이 쏟아졌지만, 전체적으로는 훨씬 더 많은 응원군을 얻었다. 여성운동가들은 그에게 “그동안 다른 생물학자들은 왜 이런 사실을 말하지 않았느냐”고 묻기도 했다. 다른 자연과학자들이 그런 사실을 ‘은폐’하지야 않았겠지만, 자신의 학문을 여성문제와 연결시킬 시야를 갖추지 못하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가능성은 있다. 최교수는 그런 면에서 꽤 ‘오지랖이 넓은’ 학자다. 최근 그의 관심은 노령화 사회의 문제로 옮아가 있다. 미국에 유학 가기 전에는 호주제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보수적인 남성이었다는 최교수는 생물학을 공부하면서 스스로의 가치관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고백’했다. “요즘 어떤 남자가 내놓고 호주제를 폐지하는 데 반대하겠어요? 논란은 끝난 셈이죠.” 김미화 등 호주제 폐지 홍보대사 6월15일 열린 ‘호주제 폐지를 지지하는 문화예술인 선언’에서 “나는 김미화가 아니라 박미화였다”는 충격적인 사생활을 털어놓아 화제가 됐던 개그우먼 김미화씨, 딸을 낳고 호주제의 폐해를 절감했다는 탤런트 권해효씨 등은 이제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호주제 폐지 홍보대사들이다. 홍석천씨와 문소리씨도 시위에 꼭꼭 참석하고 인터뷰 때마다 작품을 홍보하는 대신 호주제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혀 여성운동가들을 ‘감동’시킨다. 스타들의 대중적 영향력이 워낙 크고 직접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많은 이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호주제가 있음을 알리기 위해” 숨겨왔던 가족사를 밝힌 김미화씨는 이제 유니세프와 참여연대, 녹색연합 등 20개의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하는 시민운동가다. 그의 적극적인 사회참여는 “연예인이란 좋은 일을 하면서 살도록 운명지워진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철학에서 비롯됐다. 그는 현재 성균관대 사회복지학과 3학년생으로 앞으로 사회복지재단을 세울 꿈도 갖고 있다. 한국여성의전화연합 활동가 유재언 ‘여성신문’에 1년 남짓 호주제 칼럼을 연재한 칼럼니스트이자, 매월 셋째 주 일요일엔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호주제 폐지 길거리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는 ‘총각’ 유재언씨는 한국 여성의 전화의 유일한 남성인 청일점 활동가다. 그가 이처럼 호주제 폐지를 위해 활동하게 된 것은 고은광순씨의 시집 ‘어느 안티미스코리아의 반란’ 덕분이다. “처음엔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아줌마’란 생각에 화가 났는데 생각해보니 옳은 말이더군요. 오히려 몰랐던 걸 알게 돼 고마웠죠. 그후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의 모임 사이트에서 고은광순님을 만났고, 고은광순님이 같이 호주제 폐지 운동 하자며 저를 스카우트(?)했죠.” 그는 한국 여성의 전화에서 일하며 우리나라의 여성들이 역동적이라고 확신하게 됐다고 했다. “우리 여성들이 제도적·문화적으로 억눌려왔던 만큼 문제의식을 느끼면 문제해결에 나서는 속도가 빨라요. 그러니까 열악한 환경에서도 정말 많은 일들을 해내는 거죠.” 호주제 폐지로 가는 길목에서도 그에게는 몇 가지 걱정이 있다. 첫째는 여전한 국회의원들의 우유부단함이고, 둘째는 개인별 신분등록부가 전산화되면서 개인정보가 유출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다. 호주제 폐지 운동을 하면서 어느 한순간도 소홀할 수 없는 이유다. 유재언씨는 결혼제도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이지만, “그래도 결혼하고 싶다”고 말한다. “한국에서 결혼하기 너무 어렵다”는 말은 여자친구 하나 없는 그의 현실(?)에서 나온 말이기도 한가 보다. 드라마 ‘노란 손수건’ 많은 여성운동가들이 최근 호주제 폐지에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는 것이 KBS 일일드라마 ‘노란 손수건’이라는 데 동의한다. MBC 아침드라마 ‘그대 아직 꿈꾸고 있는가’또한 같은 이유로 볼 만한 드라마로 꼽힌다. 여성운동가들이 길에서 아무리 많은 시민들을 붙잡고 설득한들, 혼자 아들을 키운 윤자영에게 생부인 이상민이 아들을 데려갈 것이라고 ‘통보’하면서 “현행 법률상 실제 아버지인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 말하는 장면이 수많은 시청자들의 가슴에 불러일으킨 분노에 비할 수 있을까. ‘그대 아직 꿈꾸고 있는가’도 설정은 비슷하다. 여주인공은 몇 년 동안 혼자 아들을 키우지만 갑자기 아이의 생부가 나타나 아들을 호적에 입적시키고 양육권 소송을 통해 아들을 빼앗아간다. 방송사의 인터넷 게시판이 호주제 관련 논란으로 뒤덮일 만도 하다. 호주제 폐지 운동가들은 호주제의 문제점을 쉽게 이해하고 호주제 폐지 운동에 참여하고 싶다면 ‘노란 손수건’의 시청자 게시판에 먼저 들어가보길 권한다. | ||
'자료창고 > 보도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사문] 한총련 ‘새조직 건설’ 나선다 (0) | 2010.12.29 |
---|---|
[기사문] 검찰 서열 끝장! 소리 없는 혁명 (0) | 2010.12.29 |
[기사문] 호주제 폐지 '여성권리 존중' 60%가 지지 (0) | 2010.12.29 |
[기사문] ‘호주제 드라마’ 상황설정 부적절 (0) | 2010.12.29 |
[기사문] 시론] 올해를 '호주제 폐지의 해'로 (0) | 2010.12.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