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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문] 시론] 올해를 '호주제 폐지의 해'로

 
  

 
[기사문] 시론] 올해를 '호주제 폐지의 해'로
발행일 : 2003-09-08 등록일 : 2003-09-09

[중앙일보 곽배희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소장] 지난 4일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한 법무부의 민법 개정안이 입법예고 됐다. 드디어 올해가 호주제 폐지의 해로 기록될 것인가 하는 기대로 만감이 교차한다.

호주제를 폐지해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호주제는 여성과 남성을, 딸과 아들을, 어머니와 아버지를 차별함으로써 헌법의 양성평등 규정을 위반하고 있다.


이는 시대 정신에 어긋나는 폭거다. 호주제는 '호주'라는 그 이름만 조선시대에서 비롯됐다. 내용적으로는 일제가 식민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도입한 제도며 식민지배의 부끄러운 잔재일 따름이다.


실제 조선시대의 '호주'는 혈연관계뿐 아니라 노비까지를 포함해 일가를 대표했다. 이는 부역과 조세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실질적인 목적에서 비롯됐으며 오늘날 세대주와 가까운 개념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따라서 호주제가 민족 고유의 아름다운 전통이라는 주장은 사실관계의 엄청난 왜곡이다.


설사 호주제가 우리 민족의 전통이라 하더라도 이는 농경사회를 근간으로 한 대가족 제도를 기반으로 성립된 것이다. 부모와 미혼자녀로 구성된 핵가족이 보편화한 오늘날에는 결코 적합지 않은 제도다. 가족제도의 변화는 가족 가치관의 변화를 수반한다.


사회 각 부문의 민주화와 양성평등 이념은 가족제도에도 유효하다고 본다. 즉 핵가족이 보편화하고 정보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오늘날에는 부부나 부모-자녀 등 모든 가족 구성원의 관계 또한 대화와 토론을 바탕으로 한 수평적 관계를 지향한다.


이는 부모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달라졌다는 말은 아니다. 일방적인 가장의 명령과 여성들의 강요된 헌신으로 가정이 유지되던 시절은 이미 지나갔다는 뜻이다.


호주제 폐지 운동을 하며 실시해 본 몇 차례의 설문조사에 의하면 시민들은 호주와 세대주의 차이조차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의미도, 실질적 내용도 없이 피해자들만 양산하고 있는 이 제도는 하루라도 빨리 폐지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법적인 당위를 이유로 호주제 존속을 주장하는 국회의원을 비롯한 사회 지도층은 그리 많지 않다. 일부는 여론.사회적 관습 등을 이유로 호주제 폐지가 시기상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사회 지도층이 부당한 관습을 바로잡아야 할 임무를 회피하는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호주제가 폐지되면 첫째, 민법에서 양성평등과 부부평등을 구현함으로써 헌법과의 괴리를 일소할 것이다. 둘째, 합리적이고 평등한 가족관계를 정립해 심각한 우리 사회의 가족문제를 해소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 일제 식민지배의 잔재를 정리함으로써 진정한 역사와 전통을 회복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호주제 폐지가 남성의 기득권을 빼앗아 여성에게 주자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남성과 여성이, 아내와 남편이, 딸과 아들이 가족 안에서 동등한 책임과 권리를 다하며 건강하고 행복하게, 21세기 사람으로 사는 길을 모색하자는 것이다.


진정한 국가 발전은 개개인이 행복할 때 가능하다. 사회 구성원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진정한 국가경쟁력을 담보하는 길이다. 호주제 폐지, 하루가 급하다.


곽배희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