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료창고/보도자료

[기사문] [정혜신칼럼]‘신파 공화국’

 
  

 
[기사문] [정혜신칼럼]‘신파 공화국’
발행일 : 2003-09-03 등록일 : 2003-09-04
[한겨레]

정신과 상담실에서 오가는 은밀한 얘기들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결국 ‘심각한갈등’에 관한 것이다.
내담자들은 현실적으로 타인과 나의 주장이나 견해가복잡하게 뒤엉켜서 고민하거나 정신 내부에서 일어나는 자신에 대한 갈등으로번민한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의 사람은 부부, 부모자식, 고부, 이웃,직장동료 관계에서 끊임없이 갈등한다.

갈등의 본질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욕구의충돌이다.

때로 이런 욕구의 충돌은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거나 새로운 인식의단초를 제공한다.

하지만 갈등이 곧바로 인간관계의 파괴로 이어지거나 회복할 수없는 마음의 상처를 남기는 때도 있다.

갈등의 과정에 강력한 ‘신파적 요소’가개입하는 경우다.

남편의 늦은 귀가 문제로 말다툼을 벌이던 아내가 갑자기“당신이 나한테 해준 게 뭐 있어”라며 가슴을 쥐어뜯거나, 숨쉬는 것 빼놓고는모든 걸 부모님 뜻대로 살아온 청소년이 어렵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털어놓는 순간에 “내가 너한테 어떻게 해주었는데” 하며 흐느끼는 부모의 모습은어김없는 신파다.

신파는 심각한 감정적 과장을 동반한다.

신파는 퇴행적 상태의 일차원적, 표피적감정이라서 얼핏 보기엔 드라마틱해 보이지만 내용은 별게 없다.

어떤 사람은 ‘뛰어난 심리극’으로 극찬하는 영화를 어떤 사람은 ‘삼류신파’라고 혹평하는 것처럼 나의 절실함이 다른 사람에겐 유치함으로 보이는경우도 있을 것이다.

신파는 절실한 느낌을 주기 위해서, 열쇠를 쓰면 간단히 열릴문을 부여잡고 긴장과 슬픔을 강요하는 과잉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갈등의관계에서 이런 감정적 과장은 상대를 어처구니없게, 질리게 하여 충돌을심화시킨다.

그래서 신파는 갈등의 본질을 왜곡한다.

사회적 영역의 갈등에도 이런공식은 그대로 적용된다.

언론인 정경희씨는 “지금 이 나라는 수구·기득권 집단과 비기득권 집단이 맞서있는 싸움터가 됐다”고 진단한다.

그만큼 갈등이 첨예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갈등의 양상들을 보면서 ‘신파의 과잉’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없다.

신파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내 문제는 축소하고 남의 문제는 확대’하는유아적 가치관과, 그 상황에 의해 불행해지는 주인공이 필요한데, 저마다 자신이그 불합리한 상황의 주인공이라고 우기는 형국이다.

호주제가 폐지되면 가족제도가 붕괴되어 금방이라도 나라 전체가 결딴날 것이라고굳게 믿는 시대착오적 마초주의자들.

현재 우리 사회의 갈등양상이 위험수위에이르러 군인을 포함한 모든 국민이 저항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어처구니없는 언론인.

뜬금없이 유니버시아드 현장에서 비장한 목소리로 멸공의구호를 외쳐대는 수구냉전 세력들.

참여정부의 계속되는 실정으로 나라가 누란의위기에 놓였다고 여론을 호도하는 거대 신문사들.

나는 그들에게서 신파극 특유의감정적 과장과 강요된 긴장감 그리고 부적절한 비장함을 느낀다.

드라마에 기승전결이 있는 것처럼 신파에도 감정의 공식이 있다.

‘엄살’과‘비분강개’로 대표되는 단순하고 극적인 감정의 표출이 바로 그것이다.

영화평론가들에 의하면 잘 만들어진 신파는 최상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며 대부분의좋은 영화들은 다소간의 신파를 포함하고 있단다.

하지만 ‘신파의 과잉’이일어나면 ‘작위적인 반전’이나 ‘극단적인 감정 경험을 위한 반복성’만이되풀이된다.

당연히 상황 속 감정에 빠져서 자기 모습이 객관적으로 어떠하리라는것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쓰지 못한다.

별것 아닌 일이나 제대로 알지 못하는일에도 쓸데없이 비분강개한다.

코미디가 따로 없다.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신파극을 찍는다는 우스갯소리나 ‘인생은 어차피 삼류신파’라는 속설은 신파의 낭만성이라도 보여주지만, 사회적 갈등의 현장에서표출되는 신파의 과잉은 문제의 본질을 호도할 뿐이다.

‘신파 공화국’인가 지금우리에겐 신파가 차고 넘치는 것처럼 보인다.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 한겨레(http://www.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