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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문] 그들은 정치적으로 당당했다

 
  

 
[기사문] 그들은 정치적으로 당당했다
발행일 : 2003-08-13 등록일 : 2003-08-22

[한겨레21] 2003년 08월 13일 (수) 18:51

[조선 전기의 여성들]

신사임당은 혼인한 뒤 오랫동안 남편 이원수와 함께 강릉 친정에서 살았다. 사임당의 아버지는 둘째 자식인 그에게 가계를 물려주고 싶어서 사위에게 “내 자네의 처만은 곁에 두고 싶네”라고 말하곤 했다. 사임당이 아들 이이를 낳은 강릉 오죽헌은 사임당 친정의 별채다. 조선 전기에는 이처럼 혼인한 뒤 남편과 함께 친정에 사는 여자가 많았다. 사임당은 죽기 전 남편에게 새 아내를 얻지 말라고 당당히 요구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다소곳하고 순종적이며 남편에게 종속된 ‘조선 여성상’이 우리의 전통은 아니었다. 지배층 사대부의 지배이념으로서 성리학이 사회에 철저하게 뿌리를 내린 조선 중기 이전까지 ‘전통적인 여성’들은 우리의 고정관념보다 훨씬 씩씩하고 당당했다.

최근 출판된 <한국생활사박물관>(사계절) 조선시대 편에 따르면 조선 전기 여성들은 직접 경제활동에 나섰고. 재산도 남자형제와 동등하게 물려받았으며 남편이 기생과 어울리지 못하도록 직접 나서 단속했다.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으면 시집은 며느리가 가져온 재산을 친정에 되돌려주어야 했다. 16세기까지는 제사도 아들딸이 돌아가며 지냈으며, 이를 ‘윤회봉사’라고 했다. 이러한 여성의 권리는 제사에서 장자의 의무와 권리가 늘어나는 17세기부터 서서히 축소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말까지 ‘여성 호주’가 드물지 않을 정도로, 호주제도 지금보다 훨씬 덜 완고했다. 정지영 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는 2001년에 쓴 박사논문 ‘조선 후기의 여성호주 연구’에서 수많은 여성호주들의 존재를 밝혀냈다. 그는 가장 완전한 형태의 호적이 남아 있는 단성(현재 경남 산청) 지역의 1678년부터 1789년까지의 호적을 연구해 전체 호주의 11.1%가 여성이었고, 남편이 사망했을 때 (아들이 아닌) 그 부인이 호주를 잇는 사례가 전체 호주승계의 93%였음을 증명했다. 또 많은 여성들이 남편이 죽은 뒤 친가로 돌아갔고 재혼도 드물지 않았다. 재산상속 등 기대할 것이 있는 양반 여성 중 일부는 수절했지만 양인의 수절은 별로 없었다. 정 교수는 특히 아버지에서 아들로 계승되는 추상적인 부계혈통만을 강조하는 현재의 호주제는 일본의 ‘이에’(家) 개념에서 나온 것으로, 일제가 식민통치를 위해 20세기 초에 도입했다고 지적했다. 현재와 같은 남성 위주 호주제는 ‘전통’이 아니며, 호주제가 사라지면 가족이 붕괴된다는 유림들의 주장은 근거가 없는 셈이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