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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문] ‘당신들의 건강가족’ 그 건강치 못한 강요

 
  

 
[기사문] ‘당신들의 건강가족’ 그 건강치 못한 강요
발행일 : 2003-11-02 등록일 : 2003-11-05

[한겨레] 세상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경제상황은 아이엠에프의 재연인 듯 끔찍하다.

세상이 어려워지면 사회적 약자들이 희생당한다.

지난 아이엠에프 당시 퇴출 기준은 ‘능력’이나 ‘경력’이 아니었다.

아이엠에프 때 여성들은 남편이 있기 때문에, 또는 가족이 없다는 이유로 ‘식구 많고 가족 딸린 가장인 남자’보다 먼저 권고사직을 당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은 늘 남자였다.

아버지를 가장으로 두지 못한 모든 가정은 ‘결손가정’이란 타이틀로 재단되곤 했다.

그나마 여성가장에 대한 안쓰러운 시선과 경제적 도움조차 불황기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자취를 감춘다.

마치 아이엠에프 때처럼, 경제불황을 틈타 슬그머니 ‘가장복권운동’이 고개를 들고 있다.

동시에 ‘가진 여자’, ‘시건방떠는 여자’에 대한 징벌의 징후가 곳곳에서 감지된다.

빙 돌려 말하고는 있지만 오늘날 가정의 문제는 대체로 ‘젊은 여성’ 탓이라고 한다.

저출산율의 ‘원흉’인 젊은 여성들이 아이를 낳기 싫어하며, 취업을 해서 가장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는 얘기들은 소주잔이 오가는 ‘가장’들의 술자리에서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일이 좋아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즐기고 꾸려가기 위해 아이를 낳지 않는 여성들은 가족이나 가정의 소중함을 모로는 철부지로 매도당하기도 한다.

이런 분위기 탓인지 호주제 폐지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했지만 국회에서 통과될지는 미지수다.

호주제 폐지가 ‘시기상조’라는, 많은 한나라당 의원들의 목소리에서 그런 조짐이 보인다.

또 호주제 폐지 반대론자들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 국회 통과는 안될 말이라고 주장한다.

때맞춰 ‘가정살리기 운동’도 한창이다.

이 운동을 펴는 이들은 건강한 부모가 함께 살며 건강한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이 건강한 가정이라고 한다.

좋은 말이다.

그렇다면 궁금하다.

한부모 가정이나 독신가정은 불건강한 가정이라도 된다는 건가. 호주제는 진정으로 건강한 가정의 기초인가. 호주제 탓에 재혼가정 아이가 성이 다른 아빠와 형제를 두는 것은 건강한가. 미혼모의 자녀가 ‘아버지 불명’이란 서류를 갖고 평생 살아가는 것은 타당한가. 네다섯살짜리 아이가 호주가 되는 현실은 과연 정상인가. 재혼가정에서 아이의 성을 바꾸려고 이중호적을 만드는 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개인의 삶을 국가가 ‘보호’하는 것과 ‘관리’하는 것은 다르다.

호주제는 ‘보호’의 문제고, 건강가정 육성은 ‘관리’의 문제다.

국가는 개인의 삶을 보호할 의무가 있을지언정, 관리할 의무는 없다.

국가권력이 개인의 가정을 ‘건강하게 관리’하면서 그들의 프라이버시까지 보장할 수 있을까. 개인의 삶은 사회적인 것이기 이전에 개인적인 것이다.

특히 가정의 핵심인 성과 사랑의 문제는 더욱 그렇다.

특히 결혼과 이혼, 독신의 문제는 개개인이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성과 사랑의 문제다.

때문에 스와핑조차 개인의 선택이나 윤리의 문제일지언정 국가가 경찰력으로 통제할 권한은 없다.

건강 가정을 부르짖는 목소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모든 이혼자와 여성가장은 불온하다.

아이를 낳지 않는 젊은 부부들도 종족번영의 책임을 방기한 꼴이 된다.

우리나라에서 누군들 자신의 가정을 눈물나게 지키고 싶지 않은 이가 어디있겠는가. 독신가정이나 한부모가정 모두 마찬가지다.

이러한 정상적인 가정을 불온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야말로 건강치 못한 폭력임을, 나는 요즘 강하게 느낀다.

마리/ 여성칼럼니스트 scigne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