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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문] “호주제를 통과시켜라”

 
  

 
[기사문] “호주제를 통과시켜라”
발행일 : 2003-08-28 등록일 : 2003-08-29
[한겨레21]

법무부 폐지안 입법예고할 예정이지만 한나라·자민련이 암초… 유림도 무섭게 반발 1999년 혼인신고를 할 때 처음 호적등본이란 걸 봤다. 호주인 아버지의 첫째 딸 이름엔 ‘제적’이란 도장이 쾅 찍혀 있었다. 대신 남편이 호주인 호적에서 ‘처’라는 지위를 새로 얻었다. 본적이 서울에서 남편 고향 전남으로 바뀌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출가외인’(백과사전에는 ‘결혼한 딸은 남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이라고 나온다)이 된다는 게 이런 건가, 조금 슬펐던 기억이 난다. “너 자꾸 말썽 피우면 호적에서 파낸다”던 집안 어른 말씀도 생각났던 것 같다.

성씨 선택과 변경의 자유 생긴다

요즘 세상에 그게 뭐 대수냐고, 어차피 호주는 법적인 권한도 없는 개념 아니냐고 따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남성 호주를 중심으로 ‘가문’을 구성하고, 호주로 ‘대’를 이어야 한다는 오랜 관습은 한국사회의 가부장적인 의식과 남아선호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한국사회는 호주제라는 가부장적 제도를 벗어나 양성평등의 기치를 올릴 수 있을 것인가.

지난 8월22일 법무부는 호주제 폐지를 뼈대로 한 민법개정안을 27일 입법예고하겠다고 밝혔다. 민법상 호주 개념과 호주승계 순위를 삭제하고, 개인별 신분등록제를 도입한다는 것이다. 1950년대부터 가족법이 개정될 때마다 폐지 요구가 제기돼온 호주제가 ‘드디어’ 폐지된다는 기쁨에 여성계는 앞다퉈 환영성명을 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은 “호주제가 갖고 있는 성차별적 가족제도의 모순점을 개선한 진일보한 법개정”이라 평가했고, 한국여성노동자회협의회는 “남성은 가부장제의 짐을 벗고, 여성은 종속되지 않는 가족관계가 활짝 열릴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정부안은 양성평등의 이념에 걸맞음은 물론, 무엇보다 ‘정상’이 아니라는 눈초리 속에 고통을 겪어온 미혼모·이혼·재혼 가정 등 다양한 가족의 요구를 받아들여 이에 걸맞은 법제도 개선의 필요성을 국가가 인정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부성강제조항’을 없애고, 성씨 선택과 변경의 자유를 주기로 한 것은 그 첫걸음이다. 개정안대로라면 원칙적으로는 아버지 성을 써야 하지만, 부부가 결혼할 때 합의하면 어머니의 성을 따를 수 있다. 무엇보다 재혼·이혼 여성의 자녀들이 가정법원의 허가를 얻어 성을 새아버지나 어머니 성으로 바꿀 수 있게 된다. 재혼한 어머니와 함께 사는 자녀들은 새아버지나 형제자매들과 성이 달라 고통을 겪어왔다.

‘1인1적’으로 불리는 개인별 신분등록제를 도입하면, 지금껏 부모의 사망·이혼·재혼 등이 한 호적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단점도 사라진다. 이혼한 어머니와 함께 사는 자녀들이 비자 등의 서류를 발급받기 위해 친아버지의 호적을 떼어야 했던 불편도 없어진다. 각자의 신분등록에는 출생·혼인·입양 등 개인의 신분변동 사항이 기록된다. 최소한의 공시 기능을 살리기 위해 부모·배우자·자녀의 주민등록번호 등 간단한 신상도 함께 게재된다. 하지만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이들의 신분변동을 열람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단계별 검색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최병렬 대표는 ‘단계적 폐지’ 주장

이같은 정부안은 국회 통과 시점 2년 뒤에 시행하도록 돼 있어 다음달 정기국회에서

통과될 경우 이르면 2006년부터 개정법이 시행된다. 하지만 ‘국회 통과’가 문제다. 국회 다수당인 한나라당과 자민련이 호주제 폐지에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당론은 “이혼·재혼 가정 자녀들의 성을 변경하는 친양자제도를 우선 도입하겠다”는 것이다. 최병렬 대표는 호주제가 폐지되면 “가족제도의 근간을 흔들 위험이 있다”(5월 <한겨레>의 한나라당 대표경선 후보자 설문조사)며 부정적 입장을 보이고 있다. 지난 7월24일 관훈토론회에서도 그는 “호주제는 손바닥 뒤집듯 바꾸는 게 아니다. 다만, 남편과 사별한 부인도 호주를 승계하는 등 보완 장치를 마련해가며 단계적으로 폐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나라당이 주장하는 친양자제도는 이미 2년 전 국회에 관련법안이 제출됐으나, 의원들의 무관심 속에 처리되지 못했을 뿐이다.

민주당도 여론의 눈치를 보면서 당론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당 관계자는 “당론을 찬반으로 정하긴 어렵고, 의원들 자유투표로 가는 게 바람직할 것”이라고 말했다. 법안을 심의할 국회 법제사법위 의원들도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긴 마찬가지다(쪽기사 참조).

호주제 폐지론자들은 “호주제가 없어져 가족제도의 근간이 흔들린다면, 흔들리는 건 부계혈통·남성중심주의 가족제도일 뿐”이라며 “호주제가 없는 외국은 가족이 다 사라지기라도 했단 말인가”라고 되묻는다.

여성계는 “가부장적이고 퇴행적인 국회의 모습을 두고 보지만은 않겠다”며 단단히 벼르고 있다. 한국여성단체연합 이오경숙 상임대표는 “지난 19일 구성된 ‘17대 총선여성연대’를 중심으로 국회의원 개개인마다 호주제 폐지 찬반 여부를 물어 반대의원 명단을 공개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단체들은 다음달 20일 한강시민공원에서 ‘호주제 폐지 시민한마당’을 열고, 10월3일 서울시청 앞에서 호주제가 폐지된 양성평등한 새 나라를 바란다는 뜻에서 ‘제2의 개천절’을 선포하는 대규모 집회를 열 계획이다.

민족반역도배들의 혈통파괴?

유림쪽의 반발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씨족총련합회·성균관유도회 총본부·한국독립동지회·대한노인중앙회 등 20여개 단체로 구성된 ‘정통가족제도수호 범국민연합’은 다음달 1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가족법 토론회를 열고 대대적인 여론몰이에 나설 계획이다. “호주제 폐지론자들은 극소수의 미혼모·이혼모 자녀의 일시적 생활상 불편을 덜기 위해 유구한 성씨제도인 부성주의를 부정하고 있으며, 여성계의 일부 몰지각한 무리들이 앞뒤 가림 없이 겨우 명맥만 남은 가족문화와 민족문화를 송두리째 말살하려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 역시 지난 5월27일 호주제 폐지 민법개정안을 제출한 국회의원 52명을 ‘혈통파괴 동조자’로 규정한 뒤 “이들 민족반역도배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주시하겠다”고 밝혔다.

정부안은 9월24일께 국회에 제출된 뒤 이미 계류 중인 국회 민법개정안과 병합 심의될 것으로 보인다. 국회가 양성평등과 개인존엄이라는 헌법정신을 반영하고, 날로 다양해지는 가족 형태를 아우를 수 있는 일대 분수령을 마련하게 될지 주목된다.

이지은 기자/ 한겨레 사회부 jieu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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