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문] 호주제, 그 선민의식을 경계한다 | ||
발행일 : 2003-08-23 | 등록일 : 2003-08-25 | |
[정윤수 칼럼] 문제는 동네 형들에게 있지 않다 정윤수 논설위원 언제나 선민 의식이 문제다. 우리 애는 착한데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옆길로 빠졌다는 얘기다. 문제의 원인은 가족 내부에도 있는데 동네 형들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다. 그러면 마음은 편해진다. 신성한 가족의 울타리가 보호되는 듯하다. 그러나 곧 아이의 가방에서는 담배가 발견될 것이다. 도대체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바로 선민의식이라는 자위수단에 있는 것이다. 현대적 삶의 급속한 팽창과 국경없는 지구 시대로의 과감한 진입에 따른 각종 문제에 대하여 흔히 듣게 되는 선민의식의 진단들, 예컨대 외래 문화만 없었다면 한반도는 아름다운 공동체였으리라는 가상의 선민의식이 문제다. '찬란한 문화 민족이요 유구한 역사'를 지닌 한반도에 싸구려 외래 문화(특히 미국문화)가 밀려 들어와 우리를 천박하고 이기적이며 근본없는 땅으로 변질시켰다는 단순한 논리, 뜻밖에도 꽤 완강한 힘을 자랑한다. 중세 봉건의 농업 공동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인류에게 '마을 공동체'의 어떤 미덕을 남겨주었다. 그것은 동서양의 선조들이 '착한 백성'이라서가 아니라 농업의 특성이 한 마을에 오랫동안 정착하며 일상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요즘 현대 사회가 각박해진 것은 동서양의 '현대인'들의 근본이 험악해서가 아니라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삶의 성격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불가피하게도 아파트와 빌딩과 도로와 자동차의 홍수 속에서 서로 경쟁해야 하는 처지다. 우리에게 있어 이 양상은, 서구의 일정한 영향도 있지만, 우리 사회가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삶이었다. 이 조건에서 비롯되는 이른바 '현대사회의 다양한 갈등'은 서구가 주입해준 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일정한 성숙 과정에서 자연스레 파생되는 우리의 문제이다. 어쨌든 선민의식은 완강하다. 당장 고등학생들에게 이러한 주제로 '논술 문제'를 내보기 바란다. 아마 십의 팔구 명은 '외래 문화를 비판적으로 흡수하고 유구한 전통문화를 창조적으로 계승하여' 식의 틀에 박힌 주장을 써놓을 것이다. 성찰이 결여된, 그러나 '국영수' 중심으로 청춘을 다 보내는 아이들이므로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어쨌거나 안타까운 논리다. 진짜 문제는 어른들이 그런 생각을 한다는 점이다. 다름 아닌 호주제가 그렇다. 예상되는 변화 가운데 가장 극단적인 변화, 곧 호주제 그 자체의 완전한 폐지가 입법 예고되었다. 수십 년 지속된 논쟁이 이제 실질의 차원에서 재연될 전망이다. 벌써부터 방송 뉴스에서는 찬반의 입장이 선명하게 대립하고 있다. 어느 뉴스에서는 호주제를 지지하는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 '호주제가 폐지되면 서구의 개인주의가 물밀 듯이 밀려와서 가족의 붕괴되고 근본이 파괴될 것이다.' 바로 그와 같은 선민의식이 문제다. 가족이 붕괴되고 어떤 결핍으로 고통을 받는 까닭은 동네 형들 때문에 아니라 호주제 그 자체의 전근대적인 모순 때문은 아닐까. 온 가족이 즐겨보는 홈 드라마와 미니 시리즈에서 거의 매일이다시피 편부 편모 가정에서 성장한 남녀의 연애를 한사코 반대하고 가로막고 혐오하는 한반도 아닌가. 게다가 이러한 주장은 선민의식이 어떻게 사물에 대한 판단력을 흐려놓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와 같은 완강한 편견을 가진 사람들을 위하여 나는 몇 편의 영화를 권하고 싶다. 과연 서구가 '극단적 개인주의로 가족이 붕괴된 근본도 없는 곳'인지 몇 편의 영화로 확인해보기 바란다. 먼저 다니엘 데이 루이스 주연의 <나의 왼발>과 영국의 거장 감독 마이크 리의 <비밀과 거짓말>이 있다. <나의 왼발>은 몸이 아프고 따라서 마음까지 상처받은 아이를 위하여 '서구 개인주의'의 어머니가 얼마나 헌신적으로 전 생애를 바치는가를 아름답게 보여준다. 마이크 리의 영화 역시 '근본 없는' 주인공들이 어떻게 유전자의 그늘이 드리워진 가족의 마지막 참호를 회복하는가를 뜨거운 눈물로 확인시켜 준다. 막시 폰 시도우의 역사적 명연이 펼쳐지는 <정복자 펠레>와 가난한 철강지대의 꿈을 그린 <빌리 엘리어트> 또한 아예 DVD를 구입하고 싶은 걸작이다. 아마 이 영화를 미리 본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제목이 언급될 뿐인데도 무릎을 치며 새삼 눈물 한 점 떨굴지 모른다. 처참한 가난의 굴레를 아이들은 어떻게 탈출하여 세상을 향해 달려나가는가. 바로 아이가 져야할 짐을 모조리 짊어진 '서구 개인주의'의 아버지들이 있었던 것이다. <빌리 엘리어트>의 마지막 장면, 허공 중으로 비상하는 주인공의 춤은 가난과 편견을 이겨낸 희망의 다른 표현이다. 이상의 영화들은 서구이긴 하되 미국 영화는 아니다. 바로 그 트집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을 위하여 '근본이 파괴된 개인주의'의 나라 미국의 영화를 소개한다. 끝내 화해하였으나 곧 죽음으로 설움을 대신하는 아버지와 딸의 지친 여정을 다룬 헨리 폰다, 제인 폰다 주연의 <황금 연못>이나 이혼 가정의 정체성에 대한 교과서에 가까운 <크레이버 대 크레이머>라면 너무 고전이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출중한 연기력의 숀 펜이 정신지체자로 연기한 <아이 앰 샘>이 있다. 이 영화는 '눈물'의 교본이다. 이른바 정상적 가족과 비정상 가족의 경계를 가볍게 초월한다. 그러한 운명적 조건을 문제 삼지 않는다. 개인에게 있어 그것은 주어진 조건일 뿐 심각한 문제가 될 수는 없다는 사회적 합의가 영화 속에 깔려 있다. 마음 아픈 것은 이 영화가 탄탄한 사회복지 제도 속에서도 가족의 소중함을 재확인시켜주고 있는데, 허약한 복지제도에 낡고 닳은 편견이 지배하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 보면 정말 '행복한 문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여튼 미국이 '극단적 개인주의로 가족이 파괴'되었다고 진단하는 선민주의자들로서는 꽤 심란한 고민을 안겨줄 것이다. 문제는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이른바 '비정상적 가족'에 대하여, 2차적으로 형성된 가족에 대하여, 편부와 편모 아래서 성장한 연인들에 대하여, 몸의 불편과 마음의 상처를 지닌 아이들에 대하여 야만적인 배제와 편견을 '제도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 이 조건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사실에 부합하지도 않고 실현할 수도 없는 옛 마을공동체를 '창조적으로 계승'할 것인가. 아니면 당장 실현 가능한 제도의 개혁과 그에 따른 마음의 감옥을 허무는 쪽을 선택할 것인가. 답은 자명하다. 문제는 동네 형들에게 있지 않다. 우리 '가족'의 내부에 있는 것이다. 2003/08/23 오후 6:56 ⓒ 2003 OhmyNews -------------------------------------------------------------- 정윤수 논설위원은 문화비평지 계간 <리뷰>와 위성채널 스카이KBS의 축구 해설위원을 지냈습니다. 문화와 스포츠 분야에 걸쳐 기획·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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