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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문] <와이드 스타탐구>"돈보다 `사람`벌면서 살래요"

 
  

 
[기사문] <와이드 스타탐구>"돈보다 `사람`벌면서 살래요"
발행일 : 2003-06-19 등록일 : 2003-06-26

  [문화일보] 2003-06-19 () 18면 3327자    
    
약속장소는 그녀가 다니고 있는 성균관대였다. 12시 오전수업이 끝나고 1시30분 오후수업이 시작되기전 점심을 겸한 인터뷰였다. 며칠째 오락가락하는 비. 쥐색 가디건, 청바지에 운동화차림, 화장기 없는 맨 얼굴, 큰 가방 두개를 들고 나타난 그의 모습에서 스타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너무 어려보여서 김미화씬지 몰라보겠다”고 했더니 “그래도 처음엔 과 아이들이 선생님이라고 불러 ‘반협박’끝에 언니, 누나 부르게 했다”며 웃었다.

김치찌개 백반을 시켜놓고 얘기를 시작했다. 김씨와 기자는 동갑내기다. “우리사이에 뭐, 밥이나 먹으면서 편하게 하자고요”라며 그가 먼저 경계를 허물었다.

김미화(39)씨는 이 학교 사회복지학과 3학년이다. 대충 이름이나 걸고 절반이상은 ‘땡땡이’치는 연예인들과는 다르다. 일주일에 4일, 그중 2일은 아침부터 한밤까지 강의가 이어진다. 데뷔 20년차의 중견 개그우먼, MC라는 본업에 늦깎이 대학생, ‘참여연대’‘환경운동연합’‘호주제폐지를 위한 시민 모임’ 등 20여개 NGO에 참여하는 ‘준 사회운동가’라는 타이틀이 얹어진다(그가 직간접으로 관여하는 시민사회단체는 50여곳에 이른다). 요즘 웬만한 시위현장에는 그가 빠지지 않는다. 80년대 김한국과 함께, 숯검댕이 일자눈썹을 붙이고 “음메 기살어”“그것도 딱딱 못맞춰”를 외치던 그가 이제는 연예인 사회참여의 대표주자로 변신해있는 것. 최근에는 연예인 최초로 방송사 시청자위원회 위원(MBC)으로 위촉됐고, 사실혼관계에서 태어났으며 친아버지가 돌아가신후 성씨가 바뀌어야 했던 아픈 개인사를 공개하며 호주제 폐지운동에 앞장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우선 학교 얘기부터 시작했다.

―학교는 왜 다닙니까.

“알려진 사람으로서 나이들고 인기가 떨어졌을 때, 여전히 가치있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일이 무얼까 고민했어요. 공인으로서 그간 받은 사랑을 사회에 되갚을 방법도 생각했고요. 박사과정까지 진학해서 사회복지재단을 세울 생각입니다.”

―애초부터 사회파 이미지는 아니었는데 맹렬한 사회참여 활동을 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어려서 참 가난했고 그래서 개그우먼이 돼 성공하면 불행한 사람들을 돕겠다는 게 제 목표였어요. 예전에 KBS ‘100세퀴즈쇼’에서 독거노인, 고아와 일반후견인 100쌍을 연결시키는 특집을 했는데 나중에 보니 후원을 계속하고 있는 사람이 100쌍중 저뿐인거예요. 그때 담당PD, 저, 뜻을 같이한 몇사람이 모여 결연프로그램인 ‘사랑의 삼각끈 운동본부’를 만들었죠. 그다음 유니세프 홍보대사를 하고, 그쪽 사회단체들의 살림살이나 형편을 뻔히 알고 있으니 도움요청이 있으면 거절하지 못하고 시간이 허락하는대로 돕다 보니 이렇게 됐어요. 참여연대나 환경운동연합은 그쪽에서 제의가 있기 전부터 이미 회원이었어요.”

―원래 정치적 관심이 큰 편이었나요.

“아뇨. 전 투철한 신념도 없고 열혈 페미니스트도, 투사도 아니에요. 그냥 불합리한 일을 합리적으로 고치는데 관심이 있고 거기에 내 이름값이 보탬이 되면 더 좋겠다는 정도죠. 사실 예전엔 가까운 정치인들도 있었는데 이번 대선때부턴 그쪽하고 아예 인연을 끊었어요.”

―어려서 고생을 많이 하면 오히려 돈과 성공에 더 집착하게도 되잖아요.

“처음엔 저도 그랬죠. ‘쓰리랑부부’로 한창 떴을 땐 지방공연에 밤무대에 돈버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그렇게 몸을 혹사하다가 첫아이를 유산했고, 그때 크게 깨달았죠. 그래, 사람이 절대 돈의 노예가 되면 안된다. 돈에서 자유롭기 위해 매니저도 안뒀어요. 매니저 두면 돈은 많이 벌지만 인간관계는 끝이거든요. 돈생각하면 사회참여활동도 할 수 없어요. 연예인한테 시간은 곧 돈이니까.”

―얼마전 TV오락프로에 자택을 공개했는데 강남 아파트에 에어컨을 켜놓지 않아 MC들이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방송조명때문에 그랬지 보통땐 창문 열면 대충 시원해요. 그 정도 날씨에 에어컨 틀면 안되죠. 암튼 그날 이후에 선풍기 하나 더 들여놨습니다(웃음). 저희같은 공인일수록 돈에 대한 철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밤무대안하고 남들 쉴 때 안쉬고 번 돈이니까 절대 함부로 안씁니다. 어떤 분들은 저보고 운동하는 사람이 강남살면 되냐, 너무 부자아니냐 하시는데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이 돈도 많고 잘 사는게 좋지 그게 비난받을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단 그 돈을 사유화할 욕심은 없어요. 남편의 동의가 필요하지만 나중에 제 재산을 전부 사회에 내놓을 생각이에요. 두딸에게도 엄마는 대학교육까지만 시켜줄거다, 나머지는 너희들 스스로 자립적으로 살아야 한다, 이렇게 가르칩니다.”

―연예계 전반의 조로풍토 속에서 20년동안 방송현장을 지키고 동년배중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코미디언으로 남았다는 사실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인데요.

“제게도 슬럼프가 있었고 데뷔초에는 얼굴이 못생겨서 안될거라는 말때문에 상처도 많이 받았어요. 긴 호흡으로 연예인으로서의 전 생애를 생각하며 살아온 것이 도움이 됐달까요? 개그맨도 어느 시점부터는 그저 시키는대로 하는게 아니고 스스로 기획하고, 경험이 짧거나 젊은 PD들에게 오히려 아이디어를 주는 기획자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가령 ‘개그콘서트’같은 프로는 저와 전유성 선배가 젊은 후배들을 발굴해서 만든 프로예요. 망설이는 KBS를 설득해 대박이 났죠.”

―연예인에게도 적절한 시점에 자기변신이 필요하고, 대중에게 보여주고 자신도 열중할 새로운 제2의 인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준 셈인데요, 김미화씨가 생각하는 ‘김미화식 코미디’라면.

“나이를 초월하는 코미디요. 선배의 노련한 재능과 후배의 젊은 감각이 어우러지는 코미디. 코미디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기본은 똑같아요. ‘개콘’이 그렇지만, 그 틀만 살짝 젊은 감각으로 비틀면 되거든요. 그러니까 코미디언이 나이먹었다고 곧 은퇴는 아니라는 거죠. 대신 생각은 바꿔야 해요. 가령 ‘개콘’의 ‘봉숭아학당’ 코너에서 연기경력 17~18년의 제가 데뷔 3개월의 김대희, 김영철한데 ‘엥기는’ 연기를 했는데 그게 창피하거나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면 안돼요. 후배를 키우면 후배한테 잡아먹히는게 아니라 후배는 후배대로 크고 선배도 그 덕을 보게 돼있어요.”

길지 않은 인터뷰가 끝났다. 김씨는, 수저만 몇번 꽂았을 뿐 싸늘하게 식어버린 김치찌개와 기자의 빈 속을 걱정했다. 도대체 이 작은 체구의 여자가 연예계라는 상업적 시스템안에 소모되는 부품이기 십상인 연예인의 위치를 뛰어넘어 자기중심과 진심을 가진, 인간적이면서 사회참여적인, 진정한 스타로 거듭나게 된 동력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인터뷰 말미 그에 답하듯 그는 말했다. “전 돈보다 성취감, 좋은 인간관계를 위해 일해왔어요. 제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 사람들과 잘 어울려 사는 거예요. 그리고 제게 아주 나쁜 버릇이 있는데요, 사람들이 절 싫어하는 걸 절대 못참는답니다.”

양성희기자 cooly@munhw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