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문] "너는 성도, 본도 없냐! 어디 김씨야?" | ||||||||||||||||
발행일 : 2003-09-26 | 등록일 : 2003-09-26 | |||||||||||||||
[오마이뉴스]
공청회는 없었다. 토론은 진작 물 건너갔다. 공청회의 규칙도, 반론에 대한 존중도, 상대방에 대한 예의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25일 오후 2시 서울 서초동 변호사회관 지하 대회의실에서 열린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한) 민법개정안 공청회'는 정통가족수호범국민연합(정가련) 측 방청객 80여명에 의해 그렇게 아수라장이 됐다. 이날 공청회는 법무부와 여성부가 정부의 민법개정안을 확정하기에 앞서 각계의 의견 수렴을 위해 마련했다. 공청회의 주제 발표자로는 법무부의 가족법 개정 특별위원인 김상용(부산대 법대) 교수와 곽배희 한국가정법률상담소장이 나섰고 토론자로는 호주제 폐지 반대 입장을 갖고 있는 구상진(정가련 공동대표) 변호사와 정환담(전남대 법대) 교수가, 찬성 측 토론자로는 이오경숙 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와 진선미 변호사가 참석했다. 민법개정안은 이날 공청회를 거쳐 내달 초 국무회의에서 확정돼 국회에 제출될 예정이다. 그러나 돌발 중단사태와 연이은 정가련 회원들의 항의로 결국 그 취지가 무색하게 됐다. '양반' 자처하는 정가련 회원들, 법무부 장관에게도 욕설
이날 토론회의 심상치 않은 기운은 강금실 법무부 장관의 축하인사에서부터 감지됐다. 법무부와 여성부가 공동으로 주최한 공청회였기에 이날 강 장관은 직접 참석해 축하사를 했다. 하지만 정가련 회원들에게 '호주제 폐지 민법개정안'을 마련한 법무부의 수장은 달가운 손님이 아니었다. 강 장관이 공청회장에 들어서자 정가련 회원들은 '막말'을 하기 시작했다. "어이, 강금실이고마!" "허허, 장관이여?" 공청회에 시작하기에 앞서 강 장관이 연단에 올랐다. 그러자 정가련 측 방청석 여기저기서 비하발언이 터져 나왔다. "○○○이 마누라가 왔는갑네…" "XX년, 지랄하네"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장관은 "조금만 조용히 해주십시오"라며 발언을 시작했다. 강 장관은 축하사를 통해 법무부의 민법개정안의 취지를 설명하고 "오늘 공청회가 호주제 관련 논쟁의 종점이라기 보다는 생산적이고 실질적인 논의의 시작이라고 본다"며 "오늘의 공청회가 소기의 성과를 올리도록 협조해 달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강 장관의 당부는 이날 실현되지 못했다. 강 장관이 퇴장하고 본격적인 공청회가 시작됐다. 하지만 불과 15분만에 공청회는 중단되고 말았다. 정가련 회원들의 돌발 항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날 주제발표자로 나선 김상용 교수는 '자녀의 성(姓)과 본(本)에 관한 민법개정안 해설'을 발표하며,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했다.
"우리 민족 구성원 모두가 성을 가지게 된 것은 약 100년 전의 일이다. 한말에 노비제도가 철폐되면서 비로소 모든 사람들이 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원래 성은 소수 왕족과 귀족의 전유물이었으나 역사의 발전과 더불어 점차 보급확산되면서 마침내 모든 사람들이 성을 가지게 되었다. (중략) 조선시대에 양반사회가 발달되면서 문벌의식이 고조되자 현조·명조를 두지 못한 벽관들이 기존에 명문대성에 동화되기 위해 본관을 바꾸는 개관·모관행위를 자행한 것이다. … 본관을 적극적으로 바꾸었던 것은 명조·현조를 두지 못했던 양반가문이나 조선후기 신흥양반들만이 아니었다. 조선중기까지만 하더라도 인구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던 노비를 비롯한 무성층도 조선후기에 이르러 점차 양인화되면서 성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러자 정가련 측 방청석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급기야 김 교수가 "인구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던 노비를"이란 부분을 발표하자 정가련 회원 10여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김 교수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폭언을 쏟아냈다. "이거 치워버려! 이게 뭐야, 이게!" "너 어디 김씨야? 너부터 성과 본을 밝혀!" "우리 조상님들의 50%가 노예였단 말이야!" "저거, 끌어내!" "우리 증조 할아버지가 계신데, 고작 100년 전에 성을 갖게 되었단 말야?" "저 자식 강금실이 애인 아니야?" 공청회장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됐다. 몇몇 정가련 회원들은 연단 앞까지 나와 "이번 공청회는 무효"라고 주장했다. 또 이들은 "장소가 협소하다, 겨우 변호사회관 지하에서 하는 공청회는 인정할 수 없다, 적어도 장충 체육관에서는 해야 한다"고 소리를 치기도 했다. 이런 사태는 정가련측 토론자로 나선 변호사와 주최측인 법무부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계속됐다. 정가련 측 토론자로 나선 한 변호사는 "나도 김 교수의 멱살을 잡아 내치고 싶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항의사태를 지켜보던 토론자 구상진(정가련 공동대표) 변호사는 방청석으로 내려와 정가련 회원들을 향해 "나도 지금 김 교수의 멱살을 잡아 내치고 싶지만 오늘은 토론자로 나왔으니 토론회가 원만히 진행돼야할 것 아니냐"며 "내 절을 받고 여러분이 자중해 달라"며 바닥에 엎드려 큰절을 하기도 했다.
주최측과 사회자도 나섰다. 주철현 법무부 법무심의관은 "오늘은 정부가 주최하는 토론회"라며 "이대로 사태가 진행되면 공청회 진행이 어렵다, 계속 이런 상황이면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내보낼 수밖에 없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사회를 맡은 한봉희(동국대) 명예교수도 "오늘 토론회가 원만히 진행되도록 도와달라"며 수 차례 부탁했으나, 정가련측은 여전히 "김 교수가 사과해라" "김 교수가 나가야 공청회를 보겠다"며 항의를 그치지 않았다. 토론회는 1시간이 넘게 중단됐다. 법무부 직원 10여명이 직접 나서 정가련 회원들을 설득하고 "규칙을 지키지 않거나 부적당한 행동을 하면 퇴장당할 수도 있음"을 수 차례 알렸으나 소용없었다. 보다못한 여성단체 측 방청객들이 "우리 조용히 합시다"라고 하자 정가련 측은 여성들을 향해 "너희는 뭐야, 너희는 다 노비야?"라고 하기도 했다. 결국 토론회는 중단사태를 빚은 지 1시간 만인 오후 4시 30분이 돼서야 속개됐다. 하지만 김 교수의 주제발표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정가련 측 방청석은 여전히 술렁였다. 김 교수는 발표를 다시 시작하며 "오늘 발표를 통해 민법개정안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우리의 성씨 제도가 태초부터 있었던 것이 아닌 역사·문화적 산물이며 앞으로도 역시 변할 수 있는 일이란 점을 기존 연구자료와 역사 고증자료를 통해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멱살잡이'까지 일어날 뻔... 결국 '소란 속 폐회' 선포돼 중단사태 이후에도 공청회는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이날 공청회를 마련한 법무부와 여성부는 이번 개정안에 대한 주제발표자로 법무부의 가족법개정 특별위 위원인 감상용 교수와 곽배희 한국가정법률상담소장을 지정했다. 그리고 토론자로는 호주제 폐지 반대 측 2명과 찬성 측 2명을 초청했다. 그러나 정가련 측 토론자인 구상진 변호사는 "결국 호주제 폐지론자가 4명이고 우리편은 2명 뿐인 4대 2의 불리한 구도"라며 "내가 부족한 사람의 몫까지 발표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무려 60분에 가까운 시간을 독차지하기도 했다. 공청회 막바지인 질의·응답 시간는 멱살잡이가 일어날 뻔한 상황도 벌어졌다. 공청회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던 호주제 폐지 찬성 측 방청석에서 발끈하고 나선 것. 호주제 폐지 찬성 측 토론자의 발언이 있을 때마다 정가련 방청석에서 "들어볼 필요도 없다, 집어치워, 무슨 새소리들이야"라고 소리쳤고 보다못한 반대측 방청객이 "얘기조차 듣지 않으실 거면 왜 오셨느냐"고 말했다. 순간 고령의 정가련 회원 2∼3명이 "너 몇 살이야, 임마"라고 소리치며 멱살을 잡을 듯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주변에 있던 다른 방청객과 법무부 직원들이 두 측을 중재했지만 고성은 그치지 않았다. 사태가 진정될 줄 모르자 사회자인 한봉희 교수는 "이날 토론회가 유종의 미를 거두길 바랬는데 이렇게 돼 유감이다, 어쩔 수 없이 오늘 공청회는 이것으로 마치겠다"며 '소란 속 폐회'를 선언했다. 끝까지 자리를 지켰던 여성단체 측 방청객들은 공청회장을 빠져나가며 "이것이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중요시하는 '양반'들의 모습이냐"며 "'안하무인'을 실감했다"고 혀를 찼다. 정가련 측 방청객으로 참석했던 한 시민단체 대표는 "양측 간 인식의 차이가 있어서 벌어진 일이고 주최측도 발제자와 토론자 구성을 공정하게 하지 않은 책임이 있다"면서도 "(회원들이) 공청회의 규칙을 안 지키고 소란을 피운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날 공청회는 법무부가 입법예고한 민법개정안에 대한 사회 각층의 의견을 수렴해 최종안을 확정하기 위한 자리였다. 그러나 공청회의 취지는 얼룩지고 말았다. 이날 확인된 것은 몇 년이 지났지만 좁혀질 줄 모르는 시각 차이와 스스로 '양반'임을 내세우는 정가련 회원들의 몰상식이었다.
/김지은/권우성 기자 (luna@ohmynews.com) -------------------------------------------------------------------------------- 덧붙이는 글 [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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